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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경험/리뷰

퇴사후기│번아웃을 극복한 심리상담, 리추얼의 시간

by 매거진 로지 2021. 12. 5.

 

퇴사 후, 심리검사를 받았다


회사를 벗어난 한 달 동안 부지런히 움직였다. 관심이 생긴 분야의 자격증을 따고, 읽고 싶던 책을 잔뜩 읽고, 매주 2번씩 운동을 하고 시간과 거리가 되는 대로 강연에 참석하고, 가끔은 혼자 영화관에 가서 조조 영화를 봤다. 오랜만에 생긴 시간과 온전히 백지가 된 일상이 금방이라도 사라질까 꽉꽉 채워 보냈다.

그리고 다음 한 달 동안은 급격히 우울해졌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겁이 났고, 상처 받았던 순간들이 트라우마처럼 떠올랐다. 비관적인 태도와 무기력이 나를 집어삼켰다. 결국,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누구도 만나기 싫었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인생에 대한 번아웃이었다. 이런 내 모습이 너무 낯설고 힘들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서 밤새도록 인터넷 세상을 배회하다 우연히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뭔가에 홀린 듯이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사실 대단한 것을 기대하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도움이 필요했고, 누군가가 나를 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했던 것 같다.

심리상담 첫날. 상담의 바탕이 될 검사지가 있었는데, 약 50개 정도 되는 질문에 대한 문장을 작성하면서 내 몸과 마음에 숨겨졌던 상처들이 하나씩 살아나는 것 같아 슬펐다. 결국, 나는 상담사님께 완성된 질문지를 제출하며 엉엉 울어버렸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손쓸 겨를조차 없이 쏟아져 나와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나는 덤덤하게 다시 일상을 이어갔다. 일주일 뒤, 두 번째 상담이 시작됐다. 첫날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였고, 제출하며 눈물을 쏟았던 질문지의 내용에 대해서도 울지 않고 나름 씩씩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아주 어린 꼬꼬마 시절부터 30대 직장인 시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밑바닥까지 털어냈다.


어느 날 '나이가 들면~'이라는 질문의 뒤에 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망설임 없이 적었다. 내가 쓴 문장을 본 상담사님이 물으셨다. "좋은 어른이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걸까요?" 글쎄요. 질문을 받자마자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막연히 좋은 사람,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왜 그렇게 되고 싶은지. 왜 그게 좋은 것인지는 스스로 정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일주일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대충이나마 그 답을 하나의 단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선한 강자'가 되고 싶다


마음에 분노, 미움, 원망, 좌절, 절망, 우울의 감정이 몰아쳐도 자신을 다잡고 환기할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사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며 나의 가치를 나누어 주고, 어떤 도움이든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선한 영향력으로 더 넓게 퍼져나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나로 인해 타인이 행복할 수 있다면, 내 행복을 나눌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방적인 권력이나 육체적인 힘을 가져서 타인의 위에 서는 사람이 아닌,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무너지지 않는 힘을 가진 '강자'가 되고 싶다. 내면을 단단하게 쌓아 나의 앞길만 보지 않고, 타인의 고통과 아픔, 억울함에 공감하며 위로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바라는 어른의 모습. ‘선한 강자’가 되기 위해 나는 내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어린 시절 상처 받은 아이부터 안아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심리상담을 하면서 나는 이타심은 굉장히 높은 수치를 자랑하지만, 자기 확신과 자기 존중의 영역은 정상 수준보다 낮다는 결과가 나왔다. 검사지를 보면서 예상했던 결과라 덤덤한 척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참 아팠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에 급급해 놓쳐버렸던 나의 모습. 타인이 상처받지 않길 바라면서 정작 내가 상처 받는 것에는 둔했던 무심한 모습을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서툴지만 연습을 해나가고 있다.

두 달 간의 심리상담을 마치고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여름도 함께 끝났다. 억수처럼 퍼붓던 소나기도,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마음속 장마도 이젠 안녕이다. 선선하고 낭만적인 가을을 지나 설레는 겨울이 찾아온다. 이번 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지친 인생의 번아웃에서 벗어나 따뜻하고 빛나는 새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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